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6 군사정변 (문단 편집) === 끊임없는 정치 불안 === [[1960년]]의 [[4.19 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수석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관|외무부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 부정선거에 따른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은 임기 시작이 8월 15일이었으니 권한 승계의 자격이 없었다. 물론 이기붕 역시 4.19의 풍파에 벗어날 수 없었고,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4월 28일 아들의 총격에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그 다음 대행 순서는 수석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관|외무부장관]][* 당시에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 제도가 폐지되고 대신 외무부장관이 내각 서열 1위로서 수석국무위원을 당연직으로 겸직하여 이 수석국무위원이 국무총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현행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령]]에서는 대통령 궐위시 [[국무총리]], [[부총리]], 기타 국무위원 순으로 대행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부총리가 없고 수석국무위원이 국무총리 대신이었다. 다만 허정 수석국무위원은 개헌 후 헌법 부칙에 의하여 국무총리에 자동 취임했다.]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 오늘날로도 치면 대통령이 하야하고 국무총리가 사임하여 2순위인 [[기획재정부장관|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승계하는 상황으로 과도내각으로 불린다]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허정 내각이 스스로 내걸었던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슬로건과 같이 개혁을 급격하고 신속하게 추진하기 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추진하였고,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하야와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직으로 발생한 정부 공백 상태를 해소하고 개헌과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적으로 구성된 과도내각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허정 내각은 정치 개혁보다는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온 [[민주당(1955년)]]이 처음부터 고수해 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 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개헌 후 국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새 헌법에 따른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의석 233석 중 175석을 차지함으로써 전체 의석의 75%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는 세력이 비슷한 구파와 신파가 서로 대립하였고,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정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해 8월 국회는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격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의원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파가 합심한 결과였다. 실권은 국무총리가 갖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의 [[김도연(1894)|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3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신파의 지도자 격인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에서 단 2표 차이로 인준된다. [*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820000104]]] 구파는 신파와 내각 구성에 있어서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국 결렬되었고, 장면 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다.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구파는 별도 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가 끝내 [[신민당(1960년)|신민당(신민주당)]]으로 분당하며 완전히 갈라졌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고, 교체 사유는 비리나 정책실패가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균형 맞추기였다.~~무슨 당평책도 아니고~~ 당시 장면정부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2개월.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없었고,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신구파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다. 게다가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자리를 둘러싼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훗날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의 혼란은 지속되고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단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이승만]] 대통령 [[하야]] - [[허정 과도내각]] 수립 - 개헌 - [[제5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 [[장면 내각]]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으며, [[붕괴 후 혼란기|독재 정권이 무너졌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